여리고성이 무너진 날, 단 한 가족만 살아남았습니다. 수만 명이 살던 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그 자리에서, 라합의 가족은 살았습니다. 라합의 믿음이 무엇이었기에 하나님은 그 가족을 살리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여리고성보다 라합의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리고는 무너질 수 없는 성이었습니다
여리고는 가나안에서 가장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이중으로 쌓인 성벽. 굳게 닫힌 성문. 외부의 어떤 공격도 막아낼 수 있도록 설계된 성이었습니다. 고대 전쟁에서 성벽은 곧 생명이었습니다. 성벽이 높을수록, 두꺼울수록, 그 안의 사람들은 안전했습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이 성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판단이었고, 그것이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달랐습니다.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주었느니라. 성은 아직 그대로였습니다. 성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현실은 그 말씀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나팔을 불며 성을 돌았습니다. 무기도 아니었고, 공성 장비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걸었습니다. 말씀이 시키는 대로.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행진이었습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 여리고성은 무너졌습니다.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사람이 의지하던 것은 무너졌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졌습니다.
왜 라합만 살아남았습니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왜 라합만 살아남았습니까. 라합도 여리고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경건하거나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가족을 살리셨습니다.
여리고 사람들도 같은 소문을 들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졌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차이는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차이는 믿음이었습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자기 판단을 믿었습니다. 이 성벽은 버텨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더 믿음직스러웠습니다. 자기 판단이 말씀보다 크게 느껴졌습니다. 라합은 달랐습니다.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들키면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하나님을 더 크게 여겼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벽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크게 봤습니다.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았습니다. 그 붉은 줄 하나에 가족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붉은 줄에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라합을 살린 것은 붉은 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현실과 말씀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더 알고 싶다면 현실을 믿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인가를 읽어보세요.
라합의 믿음 — 자기를 의지하지 않는 것
그렇다면 라합의 믿음이란 정확히 무엇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정의하면 이렇습니다. 믿음이란 자기를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많은 사람이 오해합니다. 나를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는 존재를 지워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부인의 본질은 그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인 듯 대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것이 부인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인 듯 대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알지 못한다. 나는 나를 의지하지 않는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자기 명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사는 것. 그것이 자기부인이고 믿음의 완성입니다. 라합이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자기 눈에 보이는 성벽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의지한 것. 그것이 라합의 믿음이었습니다.
말씀이 내 생각과 충돌하는 그 자리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말씀 VS 내 생각 — 에덴에서 시작된 가장 오래된 갈등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믿음조차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라합의 믿음을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믿어야지. 내 판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의지해야지. 그런데 그 다음 질문이 있습니다. 그 믿음은 어디서 납니까. 내 노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까.
성경은 분명하게 답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더 열심히 노력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라합이 그 믿음을 받았듯이, 오늘 우리도 같은 믿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명철을 내려놓는 것조차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셔야 가능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믿음도 은혜이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도 은혜입니다. 라합이 기생이었음에도 살아남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격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은혜의 문제였습니다.
이 믿음의 시작점이 어디인지 더 깊이 알고 싶다면 알고 있다는 착각이 가장 위험하다 — 거듭남을 읽어보세요.
오늘 우리 앞에도 같은 질문이 있습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진 날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 판단을 믿은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사람. 성벽을 의지한 사람과 붉은 줄을 붙잡은 사람. 결과는 달랐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도 같은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경험, 내 판단, 내 의지, 내 생각을 의지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합니까. 지금 내 손에 붙잡고 있는 것이 성벽입니까, 붉은 줄입니까.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합이 성벽 대신 붉은 줄을 붙잡았듯이, 우리도 오늘 내 판단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되물어보십시오. 나는 지금 나를 부인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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